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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이란?

연암산 기슭에 위치한
달성서씨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살아숨쉬는 구암서원

대구광역시 중심의 길상지에 위치한
350년전통의 구암서원을 소개합니다.

성현의 배움의 터

예로부터 성현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터인 이곳,
서원의 역할 회복에 앞장서겠습니다.

달빛아래에서 고즈넉한 공간

달빛아래에서 고즈넉한 공간

연암산은 해발 134미터의 소담스런 산으로
달성에 세거 하였던
달성서씨의 혼이 담겨있습니다.

달빛아래에서 고즈넉한 공간

연암산은 해발 134미터의 소담스런 산으로
달성에 세거 하였던
달성서씨의 혼이 담겨있습니다.

한옥에서의 휴식

대구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마음의 여유와 휴식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구계(龜溪) 서침(徐沉) 선생의 덕을 기리며
봉안·제향 되어 시작된 역사

구암서원은 1665(顯宗6)년 連龜山(연구산) 서남쪽(현 대구초교 서남쪽 언덕)에 崇賢祠(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龜溪(諱沉)선생을 祭享(제향)하였다.
이후 1717(肅宗43)년 대구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고,
1718(肅宗44)년 3월에 四佳(諱居正)선생을 추가 배향하였고,
1741(英祖17)년 2월에 藥峯(諱渻)선생,1757(英祖33)년 8월엔 涵齋(諱嶰)선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1778(正祖2)년 본도유림이 서원 請額疏(청액소)를 올리고,
1779(正祖3)년 儒林(유림)과 本孫(본손) 합의에 의해 書院修契(서원수계)를 받았다.

1868(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복설하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을 중수 하였고,1975년 2월5일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되었다가
대구직할시 승격후에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로 17길 20번지 연암공원내로 옮기고,
2008년 8월27일 鄕儒(향유)의 총의로 樂齋(諱思遠)선생을 추향 하였다

구암서원 배향인물

서침(徐沉, 1360년경~) 구계선생

중심재
구계공 묘소
휘는 沉(침), 자는 聖黙(성묵), 호는 龜溪(구계). 고조는 고려 판도판서 달성군 諱(휘)晉(진), 증조의 諱(휘)는 奇俊(기준) 도관좌랑증 문하시중찬성사 달천군, 조의 諱(휘)는 潁(영) 호는 노남 諡(시)는 충정 문하시중 찬성사 달성군, 고의 諱(휘)는 鈞衡(균형) 호는 학암 諡(시)는 정평, 정포은과 동방급제, 좌명공신 정당문학 문하시중찬성사 세자사부, 비는 광산군부인 김씨였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영혜하고 관인후덕 하였으며, 포은선생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후에 조봉대부 전의소감을 거쳐 통정대부 전라처치사를 역임하였고, 세종조에 덕망으로 삼남균전제처사를 지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사가선생

사가선생 묘소
염수재
세종 2년(1420)~성종 19년(1488) 諱(휘)는 居正(거정), 자는 剛仲(강중), 호는 사가정. 목사 미성의 아들, 권근의 외손, 세종 26년(1444)에 식년문과하고, 세조 2년(1456)에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중시에 장원, 세조 6년에 사은사로 입명(入明)하여 그 곳 학자들과 문장 및 시를 논하여 행동의 기재란 찬사를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세조 10년(1464)에 조선조 최초의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세조 12년(1466)에 발영시에 장원, 그 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성종 1년(1470)에 좌찬성, 이듬 해 좌리공신 3등으로 달성군에 봉해졌다.

서해(徐嶰, 1537~1559) 함재선생

함재선생 묘소
함재선생 친필
중종 32년(1537)~명종 14년(1559) 諱(휘)는 嶰(해), 자는 挺之(정지), 호는 涵齋(함재), 예조참의 固(고)의 아들, 퇴계문인, 증영상, 천품이 영민하여 일찍부터 성리학을 연구함으로써 약관에 문장과 학문이 높았기에 사림의 존경을 받았으나, 오래 사시지를 못하였다.

서사원(徐思遠, 1550~1615) 낙재선생

이강서원
금호선사선유도
자는 行甫(행보), 諱(휘)는 사원(思遠), 호는 樂齋(낙재), 諡(시)는 文康(문강) 이다. 遺逸(유일)로써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고 선생은 父(부) 진사공 徐 泂(서 형)의 명을 받들어 蔡應麟(채응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글을 외우고 익힘이 총명하고 사장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날로 칭송이 더하였으며 관년이 되어서 사서에 익숙하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선생은 명종5년(1550)에 팔거현 외가에서 나시어 광해7년(1615)에 별세한 학자이고, 의병장이며 평생 교화, 덕행, 효행으로 달성십현의 한분이시다. 본관은 달성이요, 洽(흡)의 아들이며 達城君(달성군) 穎(영)의 후손으로 7세때 백부인 진사 蓮亭(연정)선생 徐 泂(서 형)에게 입양하였으며 그 뒤 鄭逑(정구), 金宇顒(김우옹), 선생의 사우이다.

서성(徐渻, 1558~1631) 약봉선생

약봉선생 묘소
소호헌
명종 13년(1558)~인조 9년(1631) 諱(휘)는 渻(성), 자는 玄紀(현기), 호는 약봉, 명종 13년 5월 19일에 안동일직면 소호리 외가에서 함재공 해의 아들로 태어났다. 李珥(이이)와 宋翼弼(송익필)의 문인, 선조 19년(1586) 문과, 임란때, 호소사 황정욱의 종사관이 되어 함북에 이르러 정욱 등이 두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될 때, 홀로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명장 유정을 접대하였고, 그 뒤 암행어사로서 삼남을 순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에 특진되고 밖으로는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형·병·호·공 등 4조판서와 의정부참찬과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이른바 고명 7신의 한분으로 선조의 유명을 받은 중신이었다.

대구지방문화재 건조물 제2호에 지정된
숭현사를 소개합니다.

문화재명 숭현사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대구문화재자료 제2호
지정일 1975년 02월 05일
시대 조선
종류/분류 서원

땅을 나라에 헌납하고,
그 은혜를 대구 부민에게 돌린 구계(龜溪) 선생

조선 초, 구계선생은 달성서씨 주손(冑孫)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는데, 임금께서 달성(현 달성공원 자리)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고 그 땅을 나라에 귀속하게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그 대가로 연신(蓮信,현재의 영선시장 자리)과 신지(新池, 현재의 서문시장)의 토지에 대한 세금을 서씨 가문이 받게 하고, 남산고역(南山古驛)과 동산일대(東山一帶)의 땅을 하사하며 두터운 상과 세록(世祿)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구계선생이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臣)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구계선생 봉안문)」 라고 사양하였다.

그리고는 대구부민이 그 은혜를 고르게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대구지방의 환곡(還穀)이자를 감해 주시기를 상소하였고, 이를 임금께서 받아들여 실제 달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자를 감면받았고, 그것이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구계 선생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에 감동한 대구 부민들이 서침 선생의 덕을 기리고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구암서원(최초 연구산 자리)’을 세웠다. 이후 구암서원은 현재 연암산으로 자리를 이동하였고, 구계 선생이 헌납한 현 달성공원 부지에는 서침 나무와 달성서씨 유허비가 세워져있다.

해발 134미터의 소담스런 연암산
서당골

현재의 구암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연암산 서당골입니다.
연암산은 해발 134미터의 소담스런 산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지방 호족으로 달성에 세거 하였던 달성서씨의 집성촌이었으며,
마을 여러 곳에 채화당, 일신재, 용담재 등의 강학소와 서당이 많이 있었던 곳이라 서당골이라는 지명에도 매우 익숙하다.
당시 서당골에는 덕망이 높은 선비나 유림은 물론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학동들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았다.